대한간호협회 초대 회장 서서평
ㆍ작성자: 관리자 ㆍ작성일: 2008년 10월 10일 ㆍ조회: 1076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은
1912년 한일합병 직후 광주에 와서 제중병원의 간호사, 선교사로 22년 동안 사회봉사 활동을 하다가
1934년 54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가난하고 병든 사람의 어머니로서 또 그늘진 곳을 밝혀주는
사랑의 사도로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서서평은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간호학을 전공했으며 이어 성경학교를 마쳤다.
그녀는 1962년 32살 때 미국 남장로교 외국 선교국이 파견하는 간호선교사로 선발되어 한국에 왔으며,
한때 군산예수병원에서 일했으며 그 뒤 서울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의 교사를 거쳐 광주제중병원
(현 광주기독병원 ) 간호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선교 활동과 사회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광주에 와서는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그녀는 원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매사를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자를 천천히 할 서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徐徐平)이라 했는데
이는 그의 본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금주(禁酒), 금연(禁煙) 운동을 전개했는데 직접 금주 동맹을 만들어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울러 인신매매 반대, 축첩금지, 공창제도 폐지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다.
 
때로는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갈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또 그가 설립한 이일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제중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간호하면서 특별히 나병환자들을 돌봤으며 여자 나병환자나 거지들을 만나면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목욕시키고 자기의 옷을 나누어 입혔기 때문에 평생 두벌 옷을 갖지 못했다 하며,
언제나 굶주린 사람에게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고, 그가 죽을 때 집에는 밀가루 두홉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원래 서서평이 미국에서 나올 때 천주교 신자인 그의 부모는 한사코 이를 반대했었다.
그래서 부모가 제중병원에까지 찾아와 딸이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자고 달랬으나
그녀는 완강히 뿌리쳤다. 이것이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그는 또 자비(自費)로 3년제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에 나섰다.
그때만 해도 여성들에 대한 교육 기회가 봉쇄되어 있어서 정규교육을 받은 여성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여자들이 한글마저도 해득하지 못하는 까막눈인 형편이었다.
 
1926년에 이 학교는 그녀의 미국인 친구인 로이스 니일(Lois Neel) 원조를 받아 광주시 양림동 뒷동산에
붉은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고 ‘니일’양 이름자의 발음을 따서 한자로 ‘이일(李一)’ 학교라 했다.
 
서서평은 또 가난한 여학생들의 자력을 기르기 위해 명주, 모시, 마포, 무명베 등의 천에다가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예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했다. 그 대금은 이일학교 여학생들의 학비로 쓰여졌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고장 수예품들의 첫 대미수출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양림에 뽕나무밭을 만들고 양잠, 제사, 직포기술을 학생들에게 보급하여 자립을 꾀하게 하였고
선교사들의 바느질 일감까지도 학생들에게 맡김으로써 배우고 일하는 즐거움 속에서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 헌금과 학교 운영비 등으로 대부분의 월급을 떼이면서도 수많은 제자들과 고아들을 돌봐주었는데
그 가운데는 양딸을 삼아 키우고 교육시켜 시집을 보내준 사람만도 13명에 달했다.
 
서서평은 한국말에 능통하게 되었으며 많은 책을 한글로 저술하고 또 외국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가 한국에 있는 일본인 간호협회와 맞서 창설한 조선간호협회의 회원에는 한국인보다 미국인 간호사가
더 많았다.
 
이 때문에 기관지인 간호협회지를 한글과 영문 혼용으로 발행해 왔는데 그녀는 이를 한글 전용으로 발행하는 한편
조선간호협회 회칙에도 ‘본회가 사용하는 언어는 조선어로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주요 저서로는 우리 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간호교과서」「실용간호학」
「간호요강」「간이위생법」등 4권과 「간호사업사」를 비롯한 많은 번역서가 있다.
 
조선간호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서서평은 1934년 6월 26일 새벽 4시, 54세를 일기로
운명하기 전 그는 ‘먼저 가니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장기는 모두 의학실험을 위해 기증되었다.
 
장례식은 12일장으로 1934년 7월 7일 양림 오원기념각에서 광주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 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 부제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그녀는 지금도 광주시 남구 양림동 선교사묘역 묻혀 있으며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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